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방콕] 에메랄드 불상의 신비로운 여정

방콕 에메랄드 사원의 법당에는 옥(玉)을 깎아 만든, 엷은 녹색의 작은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정식 명칭은 ‘프라-풋타-마하마니-랏따나-빠띠마껀’(พระพุทธมหามณีรัตนปฏิมากร), 보통은 ‘프라-깨우-머라꼿’(พระแก้วมรกต), 즉 우리말로 에메랄드 불상이라 불린다.

에메랄드 불상
에메랄드 불상
https://www.facebook.com/p/พระแก้วมรกต-วัดพระศรีรัตนศาสดาราม-100057417700307/?locale=th_TH&_rdr 


에메랄드 불상의 기원과 전설

전설에 따르면 에메랄드 불상은 기원전 인도에서 만들어졌다. 한때 실론(스리랑카)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버마(미얀마)로 향하던 중 배가 풍랑을 만나 불상이 사라지고 만다. 사라진 불상은 우연히 크메르(캄보디아)에서 발견되고 아유타야(태국)로 보내진 후 또다시 불상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그 후 1434년에 치앙라이(태국)에서 발견되는데 그 전설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434년 어느 날, ‘치앙라이’(เชียงราย)의 ‘왓-빠야’(วัดป่าญะ)사원에 벼락이 떨어진다. 벼락을 맞은 불탑이 깨지고 그 깨진 불탑 안에서 석회에 덮인 불상이 발견된다. 이를 영험하게 여긴 주지스님은 그 불상을 다른 불상과 함께 법당에 고이 모시게 된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불상의 코 부분에 덮인 석회가 떨어져 나가면서 비로서 에메랄드 불상이 세상에 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후 ’왓-빠야’ 사원은 사람들에게 ‘왓-프라-깨우’(วัดพระแก้ว), 즉 에메랄드 불상을 모신 사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치앙라이 ‘왓프라깨우’ 사원에 있는 에메랄드 불상
치앙라이 ‘왓프라깨우’ 사원에 있는 에메랄드 불상. 에메랄드 불상이 처음 발견된 장소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
https://www.chiangraifocus.net/2018/article/27 


에메랄드 불상의 이동 경로

1) ‘치앙라이’에서 ‘람빵’으로

에메랄드 불상이 발견된 당시의 ‘치앙라이’는 태국 북부를 지배하던 ‘란나’(ล้านนา)왕국의 일부였다. 1436년, ‘란나’ 왕국의 ‘쌈팡깬’(สามฝั่งแกน)왕은 에메랄드 불상을 왕국의 수도인 ‘치앙마이’(เชียงใหม่)로 옮기려 한다. 하지만 불상을 운반하던 코끼리가 어찌된 영문인지 한사코 ‘치앙마이’가 아닌 ‘람빵’(ลำปาง)으로 향하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여긴 왕은 ‘치앙마이’ 가 아닌 ‘람빵’의 한 사원에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하게 한다. 이 사원이 지금의 ‘왓-프라-깨우-던따오-쑤차다람’(วัดพระแก้วดอนเต้าสุชาดาราม)사원이다.

‘람빵’에 안치된 기간: 32년 (1436∼1468)

’왓프라깨우던따오쑤차다람’ 사원
’왓프라깨우던따오쑤차다람’ 사원
https://th.trip.com/moments/detail/lampang-24600-119269754/ 


2) ‘람빵’에서 ‘치앙마이’로

‘쌈팡깬’ 왕의 뒤를 이은 ‘띠록까랏’(ติโลกราช)왕은 1468년에 에메랄드 불상을 ‘람빵’에서 수도인 ‘치앙마이’로 옮기고 ‘왓-쩨디-루엉’(วัดเจดีย์หลวง) 사원에 안치하게 한다. ‘쌈팡깬’ 왕의 유지가 그의 아들인 ‘띠로까랏’ 왕에 의해 결국 받들어진 셈이다.

‘치앙마이’에 안치된 기간: 80년 (1468∼1548)

‘왓쩨디루엉’ 사원
‘왓쩨디루엉’ 사원
https://www.silpa-mag.com/history/article_118314 


3) ‘치앙마이’에서 ‘루앙프라방’으로

1546년, 왕위 계승 문제로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된 ‘란나’ 왕국은 이웃 나라 ‘란쌍’(Lanxang, 라오스) 왕국의 세자를 왕으로 추대한다. 이 세자의 어머니 즉 ‘란쌍’ 왕국의 왕비가 전에는 ‘란나’ 왕국의 공주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란쌍’ 왕국의 세자의 신분으로 ‘란나’ 왕국의 왕위를 잇게 된 그는 ‘란나’ 왕국 제15대 ‘차이-쳇타티랏’(ไชยเชษฐาธิราช)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1548년, ‘란쌍’ 왕국의 왕(‘차이-쳇타티랏’왕의 아버지)이 죽자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란쌍’ 왕국의 수도인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으로 돌아가는데 이때 에메랄드 불상도 함께 가져간다. ‘차이-쳇타리랏’ 왕은 그후 ‘치앙마이’로 돌아가지 않고 ‘루앙프라방’에 남아 ‘란쌍’ 왕국의 왕위를 잇게 된다.

‘루앙프라방’에 안치된 기간: 16년 (1548∼1564)


4) ‘루앙프라방’에서 ‘위앙짠’으로

당시 버마의 ‘따웅우’(Taungoo) 왕조는 주변 왕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버마의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란쌍’ 왕국의 ‘세타티랏’(Setthathirath)왕은 ─‘란나’ 왕국의 ‘차이-쳇타티랏’ 왕과 동일 인물─ 1564년에 왕국의 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위앙짠’(지금의 ‘비엔티안’)으로 옮기고,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사원을 짓게 한다. 이 사원이 바로 지금의 ‘허프라깨우’(Ho Phra Keo)의 전신(前身)이다. 현재 ‘허프라깨우’는 사원으로서의 기능이 아닌 각종 불교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변모했다.

‘위앙짠’에 안치된 기간: 214년 (1564∼1778)

'허프라깨우’
‘허프라깨우’
https://www.travelauthenticasia.com/laos-destinations/haw-phra-kaew-temple.aspx 


5) ‘위앙짠’에서 ‘톤부리’로

16세기 후반, 태국 북부의 ‘란나’ 왕국은 더는 왕조의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버마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린다. 태국 중부에 들어선 ‘아유타야’(อยุธยา) 왕국도 1767년 버마의 공격으로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그러마 버마의 태국 지배는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버마군은 청과의 전쟁으로 인해 군사를 본국으로 철수시키고 소수의 군대만이 ‘아유타야’에 남게 된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아유타야’의 장군 ‘딱씬’(ตากสิน)은 저항 세력을 규합해 버마군을 몰아내고, 새로이 ‘톤부리’(ธนบุรี) 왕국을 세우게 된다. ‘톤부리’ 왕국은 ‘톤부리’ 지역을 ─방콕 ‘짜오프라야’강을 기준으로 서쪽 지역에 해당. 지금은 방콕의 행정구역 안에 포함됨─ 수도로 삼아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해 1778년에는 ‘위앙짠’마저 정벌하고 만다. 전리품으로 가져온 에메랄드 불상은 ‘톤부리’의 ‘왓-아룬’(วัดอรุณ, 새벽사원)에 안치된다.

‘톤부리’의 ‘왓아룬’에 안치된 기간: 6년 (1778-1784)

‘왓아룬’
‘왓아룬’
https://th.trip.com/hot/วัดอรุณ/


6)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톤부리’ 왕국이 몰락하는 1782년까지 ‘딱씬’왕의 재위기간 15년은 전쟁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그는 통일왕조를 이루고 말레이 반도,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그의 세력이 미치는 비상한 통치력을 발휘했지만 말년에는 비정상적으로 불교에 심취하고 거듭되는 실정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반정 세력에게 축출당하고 만다.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 ‘짜오-프라야-짝끄리’(เจ้าพระยาจักรี)는 ─일종의 작위(爵位)에 해당한다. 그의 이름은 ‘텅두엉’(ทองด้วง)이다. ‘위앙짠’을 정벌하고 에메랄드 불상을 가져온 장본인─ ‘톤부리’ 왕국을 끝내고 새로 ‘랏따나꼬씬’(รัตนโกสินทร์) 왕국을 수립한다. 그는 ‘짜오프라야’강을 건너 새로 도성을 조성하고 1784년, ‘왓아룬’에서 에메랄드 불상을 옮겨 와 ‘왓-프라-깨우’(วัดพระแก้ว, 에메랄드 사원)에 안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콕’ 에메랄드 사원에 안치된 기간: 1784∼현재

‘왓프라깨우’
‘왓프라깨우’
https://www.nationtv.tv/news/378848618#google_vignette 

에메랄드 불상의 이동 경로

에메랄드 불상 이동 경로

1. 치앙라이 1434-1436 (2) / 2. 람빵 1436-1468 (32) / 3. 치앙마이 1468-1548 (80) 4. 루앙프라방 1548-1564 (16) / 5. 비엔티안 1564-1778 (214) / 6. 방콕 왓아룬 1778-1784 (6) 왓프라깨우 1784-현재

google maps


에메랄드 불상의 법의 교체 의식

에메랄드 불상은 계절마다 서로 다른 법의(法衣)를 갖추고 있다. 1년에 세 번 왕이 직접 법의를 교체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라마1세는 여름과 우기(雨期)의 법의를 각각 한 벌씩 제작하도록 명했고, 이때부터 계절에 따라 법의를 교체하는 왕실 의식이 시작되었다. 라마3세는 겨울 법의도 추가로 제작하도록 명했고 —태국의 계절은 여름, 우기, 겨울의 삼계절로 나뉜다— 이후 에메랄드 불상은 현재까지 모두 세 벌의 법의를 갖추게 되었다. 에메랄드 불상의 법의를 교체하는 의식은 왕이 직접 주관하는 중요한 행사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법의를 교체하는 의식은 각각 태국 음력 4월, 8월, 12월의 하현 첫째 날에 이루어진다.

-태국 음력 4월 하현 첫째 날: 겨울 법의에서 여름 법의로 교체

-태국 음력 8월 하현 첫째 날: 여름 법의에서 우기 법의로 교체

-태국 음력 12월 하현 첫째 날: 우기 법의에서 겨울 법의로 교체


여름 법의를 갖춘 에메랄드 불상
여름 법의를 갖춘 에메랄드 불상
https://th.wikipedia.org/wiki/พระพุทธมหามณีรัตนปฏิมากร 


우기 법의를 갖춘 에메랄드 불상
우기 법의를 갖춘 에메랄드 불상
https://th.wikipedia.org/wiki/พระพุทธมหามณีรัตนปฏิมากร 


겨울 법의를 갖춘 에메랄드 불상
겨울 법의를 갖춘 에메랄드 불상
https://th.wikipedia.org/wiki/พระพุทธมหามณีรัตนปฏิมากร 


라마10세가 에메랄드 불상의 겨울 법의를 여름 법의로 교체하는 모습
2023년 3월 7일, 라마10세가 에메랄드 불상의 겨울 법의를 여름 법의로 교체하는 모습. 왕이 직접 법의를 갈아입힘으로써 왕이 곧 불교의 수호자임을 상징한다.
https://www.khaosod.co.th/newspaper/newspaper-front-page/news_7547371 


2015년도에 발행된 에메랄드 불상 기념 우표.
2015년도에 발행된 에메랄드 불상 기념 우표.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52814623665493&id=177389120492&set=a.224222045492&locale=km_KH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깐짜나부리] 태국에서 가장 긴 목조 다리는 어디에 있을까?

      '깐짜나부리'(กาญจนบุรี)도(道)의 북쪽에 위치한 '쌍카부리'(สังขละบุรี)군(郡)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다리가 하나 있다. 공식 명칭은 '웃따나누썬'(อุตตมานุสรณ์) 다리인데, 보통은 '먼'(มอญ) 다리라고 불린다. '먼'은 몬족(Mon 族)을 의미하니 몬족 다리인 셈이다.       다리가 위치한 곳은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 지역에 근접해 있고 산악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한 번쯤 방문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대중 교통을 이용한다면 '깐짜나부리' 버스터미널에서 승합차로 이동하는 것이 수월한 편이다.      몬족 다리는 태국에서 가장 긴 목조 다리라고 한다. 다리는 '썽까리아'(ซองกาเลีย)강을 가로지르며 몬족이 모여 사는 마을 공동체를 잇고 있다. 처음에 세워진 다리는 지금처럼 곧지 않고 구불구불한 형태였는데, 몇 차례에 걸친 보수 공사 끝에 지금은 곧은 모양의 다리로 변모했다고 한다.  <'깐짜나부리'도의 위치> https://th.wikipedia.org/wiki/ จังหวัดกาญจนบุรี <'깐짜나부리'도의 북쪽에 위치한 몬족 다리> https://palanla.com/th/domesticLocation/detail/ 1299 <몬족 다리의 모습> https://ngthai.com/featured/38966/songkhalia-river/ <몬족 다리 위에서 (촬영: 2023년 5월) 몬족 다리에 얽힌 이야기 1) 몬족      몬족은 원래 미얀마 남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살아온 동남아시아의 토착민으로 한때는 고대 동나아시아의 주도 세력 중 하나였다. 하지만 버마족과 타이족에게 세력 다툼에서 밀리면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근대에 들어서는 오랫동안 미얀마 정부를 상대로 독립 투쟁을 ...

[방콕] 전승 기념탑은 왜 설립되었을까?

전승 기념탑      전승 기념탑( อนุสาวรีย์ชัยสมรภูมิ)은 1940년에 일어난 태국-프랑스 전쟁( กรณีพิพาทระหว่างไทยกับฝรั่งเศส)에서 태국이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42년 6월 24일, 준공식을 거행하고 세상에 선보였다. <과거 전승 기념탑의 모습 (1946년에 촬영)> 사진 출처:  https://www.silpa-mag.com/history/article_73710           탑의 모습은 소총의 총구에 부착하는 대검( 帶劍)을 형상화했다. 대검 5자루를 칼날은 바깥으로 향하고, 칼끝은 하늘을 향하도록 한데 붙여놓은 모습이다. 탑을 바치는 중간 기단 위에는 모두 5개의 동상이 서 있는데, 각각 육군, 공군, 해군, 경찰, 그리고 민간인을 나타낸다. <현재 전승 기념탑의 모습> 사진 출처: Bangkok Metropolitan Administration <전승 기념탑 중간 기단 위에 서 있는 동상들(1)> 사진 출처:   Bangkok Metropolitan Administration <전승 기념탑 중간 기단 위에 서 있는 동상들(2)>           탑을 받치는 가장 아랫부분인 기단부의 외벽에는 태국-프랑스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기단부의 내부 공간에는 유골이 안장되어 있다. 그후 한국 전쟁 및 기타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희생된 군인들의 유골과 이름을 추가로 안치하고 새겨 넣어 그 넋을 기리고 있다. <기단부 외벽에 새겨진 전사자들의 이름> 사진 출처: Bangkok Metropolitan Administration 역사적 배경 1)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쟁탈과 태국의 영토 할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