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야'(พัทยา)는 '촌부리'(ชลบุรี)주(州)에 속한 도시로 현재 태국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다. 하지만 1960년대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파타야'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음하게 된 데에는 베트남 전쟁이 하나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태국과 베트남 전쟁
1954년 9월 8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일종의 역내 군사 동맹인 동남아시아 집단 방위 조약(Southeast Asia Collective Defense Treaty)에 서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23일부터 25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동남아시아 집단 방위 조약 이사회의 회담이 열렸고, 회담 결과에 따라 동남아시아 집단 방위 조약 기구(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องค์การของสนธิสัญญาการป้องกันร่วมกันแห่งเอเชียตะวันออกเฉียงใต้)가 창설되었다. 기구의 본부는 방콕에 두었고, 회원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파키스탄으로 구성되었다. SEATO의 목적은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우따파오 비행장과 파타야
1965년, 태국은 미국이 '우따파오'(อู่ตะเภา) 비행장을 개조해 미국의 공군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승인했다. '우따파오' 비행장은 1961년, 태국 해군이 라영(ระยอง)주(州)에 건설한 해군 항공대용 비행장이다. 미국은 1966년 4월부터 1976년 6월까지 '우따파오' 비행장을 확장 개조해 미군의 공군 기지로 활용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서는 B-52 폭격기와 KC-135 공중급유기 등을 배치해 베트남 폭격의 전략 기지로 사용했다.
'우따파오' 기지는 '파타야'와 인접해 있었고, '파타야'는 자연스럽게 미군의 R&R 장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R&R은 'Rest and Relaxation'의 약자로 미군에게 주어지던 일주일간의 휴가를 뜻한다. 당시 태국에는 '우따파오' 기지를 비롯해 '나컨싸완'(นครสวรรค์), '나컨파놈'(นครพนม), '우던타니'(อุดรธานี)주(州) 등에도 미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시점에 태국에 주둔하던 미군은 약 5만 명에 달했고, '파타야'는 미군들에게 제법 괜찮은 휴가지로 유명세를 탔다.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도 교대로 휴가를 보내러 '파타야'에 드나들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파타야'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미군의 전시 휴양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추세에 따라 외부 투자자들의 자금도 대거 유입됐다. 1964년 12월, '파타야' 최초의 호텔인 'Nipa Lodge'의 개업을 필두로 대형 호텔과 각종 휴양 시설들이 속속 '파타야'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국은 병력을 모두 본국으로 철수시켰지만, '파타야'는 이미 형성된 관광 인프라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휴양지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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